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르와 앗 술라이히 (문단 편집) === 단독 집권 === ||[[파일:예멘 사나 아르와.jpg|width=345]]||[[파일:지블라 예멘.jpg|width=800]]|| || 아르와에 의해 세워진 사나 대사원의 서쪽 미나렛 ||그녀가 수도로 정한 지블라. 중앙 상붸 바치되어 있는 그녀의 궁전이 보인다.|| 1086년 한계를 느낀 아흐마드는 조금씩 관여하던 정무도 포기, 아르와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은퇴하였다.[* 그는 아쉬야에서 1091년 사망함. 다만 1098년이라고도 한다.] 이듬해 또다른 공동 통치자인 시어머니 아스마 역시 사망하며 아르와는 명실상부한 단독 군주가 되었고,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서 그녀의 이름은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다음으로 언급되었다. 정권을 잡은 후 그녀가 처음 착수한 일은 수도를 사나에서 험준한 요새인 지블라로 옮기는 것이었다. 군대를 양성한 아르와는 반간계로 알리의 원수인 바누 누자히의 사이드를 끌어내어 격파하였다. 1091년 아흐마드가 은퇴지에서 사망하자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권유로, 아르와는 내키진 않았지만 권력 유지를 위해 친척인 사바 이븐 아흐마드와 결혼하였다. 다만 아르와는 그와 사실상 별거하며 권력을 행사하였고 1101년 사바가 사망하자 다시 단독 군주가 되었다. 다만 바누 누자히와의 전쟁은 지블라 남쪽의 산악 요새 앗 타카르의 태수 알 무팟달 빈 아불 바라카트가 주도하였다. 통치에 있어 아르와는 멘토인 아스마처럼 히잡 없이 각료 회의에 나서진 않았으나 발 (장막) 뒤에 있지는 않고 신료들과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다. 그녀는 기존 수도이자 중심 도시인 사나의 대사원을 확장하고 사마라와의 도로를 개선하였다. 지블라에선 365개의 방을 갖춘 새로운 궁전을 세우고 옛 궁전 다르 알 잇즈는 대사원으로 개조하였다.[* 현재까지도 그 부속 마드라사는 쿠란 교육에 활용된다.] 둘다 그녀의 이름이 붙여졌고, 사후 후자에 안장된다. 그녀의 무덤은 후에 타이비 이스마일리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외에 아르와는 왕국 내에 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고, 농업 진흥을 통해 경제를 키웠다. 용감하고, 헌신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이던 그녀는 고등 교육을 받은 덕에 매우 지적이었으며, 시조와 역사적 사건들을 외우고 쿠란과 하디스에 뛰어난데다 미모까지 출중했다고 한다. --먼치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